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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영화를 만나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영화에 관한 기사나 비평은 물론
하다못해 프리뷰도 보지 않는 ‘별 같잖은’ 습관이 내겐 하나 있다.
적어도 영화의 최초 관람만큼은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어법과 이미지의 범위 안에서만 보고 싶은 마음에 기인한 고육지책이다.
(그런 게 가능이나 하다면...)

이러한 습관은 스포일러에 노출될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해 버리는 것은 물론
전혀 기대 못했던 뜻밖의 수확을 건지는 데는 유용하지만
가끔은, '별 같잖은‘ 영화를 우울하게 견디어 내며
상영시간 내내 잘못된 선택을 후회해야 하거나
아니면 이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와 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도 있다.

조금 창피한 일이지만
난 영화가 거의 끝나기 전까지 ‘다크 나이트’의 원제가 ‘the Dark Night’인 줄로만 알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night’와 ‘knight’간의 발음에는 차이가 없을뿐더러
배트맨은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을 지녔으므로 그래서 'the Dark Night'인가보다 했다.
그리고 배경으로써 범죄가 차고 넘치는 고담시가 우울한 밤풍경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이란 이 억만장자가 어두운 성향을 지닌 캐릭터란 것도 비밀이 아니다.
어느 모로 봐도, 'the Dark Night'는 배트맨 영화의 제목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의심도 없었을 나의 이러한 믿음이 깨진 것은
마지막에 배트맨이 사라지면서 고든 서장, 아니 청장이 한 말이었다.
배트맨은 ‘hero’가 아니고 ‘dark knight’이라고.
그리고 확인 사살로 때늦은 영화 제목이 빡! 하고 뜬다 - The Dark Knight

오잉?

영화 중간에 고든 서장이 덴트 검사를 ‘white knight'라고 지칭했을 때 이를 눈치 챘어야 했지만
한번 잘못된 믿음이 덧씌워지면 그걸 깨닫는 방법은 상상외로 어렵다......젠장.

억울한 마음에 고집을 부려보기로 한다.
- 배트맨을 ‘기사’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는 우리를 구하고 있는 것일까?
배트맨이 없었으면 혹시 조커라는 인물도 애초에 없었을까?
배트맨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기사였던 덴트 검사를
누가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측한 투페이스로 변하게 한 것일까?

어느 하나 쉬운 대답이 없다.
다만 하나, 배트맨이 dark knight인지는 모르겠지만
hero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우리가 상상하는 완벽한 존재으로서의 hero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by Christopher Nolan, 2008


암튼,
‘흑기사’의 배우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을 보고 있는 데
어느 순간 나는 이 영화의 전편인 <배트맨 비긴스Batman Begins>(2005)가...아닌
<아메리칸 싸이코American Psycho>(2000)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도 크리스찬 베일이 나온다.
그의 주변에는 브루스 웨인처럼 여자들이 많고
그리고 역시 상당한 부자로 나온다. (아마도 브루스 웨인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는 낮에는 하버드 출신의 아주 성공한 젊은 여피족이지만
밤에는 주로 도끼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잔혹한 살인마가 된다.
그리고, 굳이 억지를 부리자면 <아메리칸 싸이코>에서 크리스찬 베일 캐릭터의 이름은
패트릭 베이트맨이다...Patrick...‘Bateman’
요지는 생각이 났다는 얘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메리칸 싸이코American Psycho> by Mary Harron, 2000


베이트맨은 살인을 한다.
배트맨도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지만 죽음에 이르게 한다.
다만 베이트맨과 배트맨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베이트맨에게는 죄책감이 없고, 배트맨은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사람이 선하다고 하거나, 혹은 악하다고 하는 기준의 차이는
어쩜 딱 그 정도일지도 모른다.
브루스 웨인은 돈을 버는 사업을 하는 기업인이고,
고담시의 갱들의 목적도 같다.
악인들도 살인을 하고,
악인으로부터 선한 이들을 지키려는 이들도 살인을 한다.
다만 그들은 사형집행이나 정당방위처럼,
법이나 ‘정의의 수호’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두 얼굴의 사나이 투페이스는 아예 한 인간이 선과 악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다크 나이트>의 흑기사 배트맨과
<아메리칸 싸이코>의 살인마 베이트맨도 한 사람일 수 있다.
아니,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똑같은 배우 한 사람을 바라보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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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_Gatsby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이러한 류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잘 안보게 되더군요. 슈퍼맨의 영웅심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서 배트맨을 보는게 쉽지가 않네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보는것 같던데, 끌리지 않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아메리칸 사이코가 나온지도 그렇게 오래되었네요..히야~~. 지난 영화가 개봉되었던 날짜를 확인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슬픔에 잠기게 되네요.흑.^ ^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08/08/10 14:17
    • 빈상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어렸을 땐 TV에서 방영한 슈퍼맨을 소리만 테이프에 녹음해다가 워크맨으로 들으면서 흥분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슈퍼맨은 슈퍼히어로 영화중에 최악이란 생각이 들어요. 영화로서도 캐릭터로서도. 전혀 인간적이지도 않고 (외계인이라 그런가...) 영화의 보수주의는 한치의 오차도 없고. 배트맨은 그나마 어두운 캐릭터라는게 자꾸 끌리게는 하는데...이젠 헬기타고 미녀들을 끼고 다니는 그가 더 이상 외롭다는 생각도 안들고...

      2008/08/10 20:35
  2. bird0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르스 웨인은 돈이 매씨리즈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죠.
    정말... 천문학적으로 부자인 것 같아요. 사실 한 여자에게 올인하던(올인은 아니지만...미녀'들' 끼고 다니지는 않았죠) 배트맨은 좀 현실성이 떨어졌죠. 그렇게 위험천만한 사람 주위에 누가 있을려고 하겠어요. 게다가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들과 '순정' 은 좀 거리가 있어보이죠...

    아무튼 매편 그 엄청난 부에 놀라곤 하죠... 돈 진짜 많아요.

    2008/08/11 18:40
    • 빈상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아마도 계속 돈놓고 돈먹기로 재산을 불리고 있는 것 같아요 ^^
      (아니면 영화의 예산이 계속 늘어나고 있거나...)

      솔직히 배트맨은 여자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죠.
      어눌한 스파이더맨에겐 여자가 꼭 필요 하겠지만
      어둡고 차가운 성격의 배트맨에게 여친이라니...그에겐 좀 감상적이죠

      그리고 악당들이 맨날 슈퍼히어로의 여친만 납치하려고 들테니
      슈퍼히어로에게나 여친에게나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_-;;

      2008/08/11 20:52
  3. 신어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떻게 하면 악이 되는지를 구분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양심이 알려주는 대로 따를 뿐... 이라고 하지만
    선이라고 믿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악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커가 잡혔으니까 이제 시민들은 안전한 것일까? 구원을 받은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제 머리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질문입니다.

    2008/08/12 07:49
    • 빈상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과 악이 분명히 다른 것이라 믿고
      그것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 정치와 범죄 시스템은 같다고 하잖아요
      조커가 잡혔지만 누군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겠죠

      2008/08/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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